아침 저녁으로 아직 쌀살하지만 불어오는 바람에서 포근한 봄기운이 느껴지고 가로수에 둥지를 짓고있는 새들의 지저귐도 한층 더 명랑하게 들립니다. 기계소리 윙윙거리던 진료실도 어느 새 소음이 잦아들고 아직 썬팅을 하지 않아 훤한 창으로 석양이 비쳐듭니다. 이렇게 석양을 볼 수 있는 건 축복이지요. 해가 뜨는지 지는지도 잘 모르고 사는 것이 당연해진 요즘인데 진료실이 한가해진 틈으로 지는 해를 볼 수 있게된 게 행운으로 느껴진다면 이상한 소리일까요? 배부른 소리라고 하실 분이 계실지도 모를 일이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해도 달도 별도 돈으로 살 수없고 자연의 아름다움은 인공의 아름다움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것들이지요. 그러나 요새 처럼 기후가 불안하고 사람살이의 앞날도 불안할 때는 오디오의 음악이나 벽에 걸린 그림들 보다도 창을 열고 들이키는,긴 시간 우주를 한 바퀴 비행하고 왔을 바깥 공기와, 가지가 무참히 잘렸어도 몇 백 년의 비밀을 간직한 채 위풍을 잃지 않으려 가슴 아프게 서있는 버스 정거장의 오래된 정자나무나 영겁을 품은 회색 하늘, 노을...이런 자연이 더욱 위안을 주고 더욱 그리워지는 것 같습니다.
예찬하고 감사할 뿐 인간이 도저히 범접 못할 자연의 아름다움처럼 사람사는 세상에도 태고부터 지켜온 질서라는 것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따라야 하고 존중되어야 할 그 무엇 말이지요. 문득 작년에 어떤 분에게서 들은 말이 생각납니다.
" 채식에 정의가 있다." EBS에서 '정의'라는 제목의 강의가 한창 인기있을 때의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정의에 관심이 많다는 뜻일 수도 있고 거꾸로 그만큼 우리 사회에 정의가 부재하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지요.
음식은 안먹으면 안되는 것이긴 하나 개인의 기호의 문제이고 문화이 일부인데,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 함께 지켜야할 옳은 일이나 의로운 일을 말하는 사회정의라는 부분과 채식의 연관성이 쉽게 이해되지는 않았습니다. 전공책 외에는 문학책이나 요리책 정도나 간간이 보면서 그저 소시민으로 살아가기에도 벅찰 때가 많은 사람이 거창하게 정의라는 것을 고민해 볼 기회가 별로 없었던 게지요...하지만 채식이 건강에도 좋고 환경에도 좋다고 하는데 사회정의에는 어떻게 좋은 걸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있다가 얼마 전에 "미국의 양심"이라는 노암 촘스키라는 노학자의 책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도올 김 용옥이라는 분이 책에서 소개한 적이 있는 언어학자인데 언어학자 보다는 양심있는 지식인으로서 지금은 더욱 존경받고 있는 분이더군요. 이 분의 말을 인용해 보면 지식인이란 '인간의 문제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나름대로 이해하고 통찰해 보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또한 지식인의 역할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저명한 지식인이라고 다 진정한 지식인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오늘날 전(全)지구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는 거대한 기업들이 더욱 세력을 키우고 인간의 정신을 지배할 수 있게 된 데에는 학식과 지식과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한 몫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인간은 살기 위해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고 자원을 발굴하고 소비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먹는 것, 입는 것과 소비의 정도가 너무 지나쳐서 쓰레기는 넘쳐나고 자원은 고갈되고 지구환경이 황폐화되고 있어도 더 특별하고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먹고 입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는 그 끝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바로 홍보와 광고, 그래픽 아트, 영화, 텔레비젼 등을 운영하는 거대기업이 "인위적 욕구"를 계속 만들어내서, 대중이 그 욕구를 맹목적으로 추구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공감이 됩니다. 욕구마저도 조장되고 있는 것이지요.
"대중을 삶의 표피적인 것, 즉 소비에 몰두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기업경영자들의 생각인 겁니다. 그 결과 소비와 경쟁에 집중한 대중은 서로 더욱 소외되어갈 뿐이구요..
이러한 사회현상에 대해 노학자나 제가 염려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미래세대들 입니다. 현재의 사회구조나 문제들에 대해 아무런 기여도 참여도 하지 않은 미래의 세대들이 멀지않은 훗날에 그 결과를 고스란히 짊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촘스키의 말대로 이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큰 힘을 가진 존재들이 다국적 기업과 거대 기업 들이라면 돈 외에 그들이 바라는 또 하나는 그들의 의도와 치밀한 계획을 알아채지 못하는 우리의 "무지(無知)"이겠지요. 어떤 것이 가치있는 삶일까를 생각하지 않고, 또한 서로에 대해 연민을 느끼거나 사랑을 느끼고 서로 도와야한다는 생각을 할 틈도 없이 그저 경쟁적으로 돈을 벌고( 경쟁이 아니라 하더라도 끝없이 늘어나는 부채, 너울질하는 주식, 늘어나는 질병, 생활고에 숨돌릴 틈이 없는..) 또 배설하듯이 소비하기만 하는 지금의 우리의 삶의 형태를 한치의 연민도 없이 더욱 부채질하고만 싶겠지요. 기본적인 욕구 이상의 욕구를 끝없이 부추기며 우리의 삶을 벼랑으로 내모는 것은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학교나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의 현상입니다. 결국 어른들의 이기심과 경쟁의식이 그리고 무지가 아이들에게 대물림되고 아이들은 우정이나 사랑을 더이상 서로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더좋은 대학, 더좋은 직장을 위해 친구의 아픔에 무감각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성적이 떨어지면 인생의 낙오자가 된 듯 좌절하고 삶의 벼랑으로 스스로를 내몰아 결국 청소년의 폭력과 자살의 문제가 사회의 큰 문제로까지 대두하게 되었습니다.
그저 기업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거대기업과 과정이나 선택에 대한 고민 없이 단순히 상품을 소비하기만 하면 되는( 시스템 안에서 착실히 상품을 생산해내기도 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있는 대중들 사이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더욱 복잡한 연결고리가 있겠지만, "이기적인 거대집단들이 이 세상을 활보하고 있다하더라도 이 세상을 움직이는 시스템은 결코 획일적이지 않다."라고 노학자는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중의 각성과 경계 이외에 현사회의 미래를 보장해 줄 것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대형 백화점이 들어서고 대형 마트가 들어서는 대신 재래시장과 좌판이 사라지고 있는 덕에 도시서민이 빈민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 외에도 이제는 퇴근 길에, "추운데 얼른 집에 들어가세요."하시며 좌판의 남은 채소들을 떠리미로 왕창 사오곤 하셨다는 퇴근길 어느 아버지의 미담을 아이들에게 더이상 들려줄 수 없게 되어가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 아이들의 마음도 더욱 메마르게 만들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학교에서 점수를 채우기 위한 봉사활동 만으로 아이들에게 진정으로 사랑이나 정을 일깨워줄 수 있을까 싶은 거지요..
우리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은 분명히 존재하고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진실을 알고자 하는 힘, 깨닫고자 하는 힘은 문제를 희석시키려 하고 개인의 이익만을 위하는 그런 힘하고는 다릅니다. 진실을 알고자 하는 힘을 일깨워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스스로 채식을 선택하고 아이들에게 채식을 가르친다면 그러한 힘을 일깨워줄 수 있습니다. 먹는 것을 둘러싼 삶의 진실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아이들은 타인의 생명에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타인에 대해 연민을 느끼게 되면 더 가지고 더 먹으려는 것을 멈추고 나누고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고 싶어지겠지요. 그러면 분노가 가라앉고 서로에게 사랑이 싹트겠지요. 덜 불안해지고 빼앗을 필요가 없어지면 나눔으로써 풍요로와질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희망이 생기겠지요.그러면 우리 사회 저변에 깔린 깊은 무력감에서도 벗어나게 되겠지요. 혼자가 아니라 함께라는 새로운 믿음도 생기겠지요. 서로가 더욱 소중해지겠지요...
부모와 선생님이 먼저 남의 살 먹는 것을 멈추면 학생들은 왜냐고 물을 겁니다. 왜?는 교육의 첫걸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름다운 지구별을 보여주고 환경과 기아의 문제를 이야기해줄 수 있습니다. 식탁에서 육식을 제외시키는 작은 실천이 지구 반대편 아이를 기아에서 살릴 수 있고 지구온난화를 막을 수 있고 덤으로 나의 건강도 얻고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언제까지나 지속되는 행복한 지구를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도 해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새로운 꿈을 갖게 되겠지요. 물론 모든 아이들이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 처럼 하루종일 의자에 앉아 해가 뜨고 지는 것만 보고 있을 수는 없겠지만 그런 삶을 원하는 아이는 그런 삶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희망, 그리고 어떤 일을 하든 이웃과 자연과 더불어 조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게 되겠지요. 이렇게 자란 아이들은 더이상 폭력과 소외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지 않아도 될 겁니다.
함께 진실을 추구하는 힘, 마음을 열게 하고 사랑을 흐르게 하는 힘, 나만이 아니고 우리를 생각하게 하는 힘, 이것이 채식이 가지고 있는 힘이며 이러한 이유로 채식에 정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