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선 2013/03/15 15:46답글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는 특히
김태희와 나를 분자수준으로 분해하면 나오는 최종산물이 C, H, O 등으로 똑같기 때문에...
지금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를 뒤집어보면서 그 때 그 시절 그 음식을 먹고 산 인류가 이렇고 저러했으니...
채식의 배신이 아니라 가공식품의 배신이어야 맞습니다...
sunsmile 2013/03/15 20:36 답글
채식을 하는 목적은 건강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사랑의 빛을 되찾기위한 한 방편이자
이 윤회의 세상에서 핑퐁게임처럼 주고 받음을 끝내고 벗어나는 길을 찾고자 하는
최소한의 사랑의 마음을 내는것 뿐 언젠간 사라지는 육체의 좋고나쁨의 문제가 아닙니다
무사한나날들 2013/03/15 22:24
^^;;;; 건강을 목적으로 채식을 하는 사람도 있어요... (자연스럽게 동물 복지까지 생각하기는 하지만...) 개인의 견해 차이긴 하지만, 고양이가 쥐를, 사자가 얼룩말을 잡아먹는게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이치인 것 처럼, 사람이 동물을 먹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물론, 저는 동물이 불쌍하기도 해요. 그래서 채식을 하긴 하지만, 동물이 불쌍하므로 채식해야한다는 논리는, 동식물을 모두 먹으며 살아가는 비채식인들에게 반감만을 불러 일으킬 듯 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 봅니다... 우리만 옳고 너희는 그르다 라는 의견 개진은 조금 경계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히가시히루 2013/03/15 20:37 답글
스스로에게 생체실험(?)을 해보고 있어서, 잘못된 채식이 문제라는 말씀이 제일 와닿는거 같네요.
책공장 2013/03/16 10:22
이 책 덕분에 의미있는 논의가 활발해지는 점은 바람직한 것 같아요^^
부자됐다
2013/03/17 12:50
고마운 단초라고 보고 있습니다.베닥 선생님들의 견해를 바라보면서 깊이 생각합니다. 나는 부지런하고 공부 좀 하는 비건인가?하구..감사합니다.
이 책 후기 좀 올려봐야 겠다 싶어서 사서 읽다 읽다 그냥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맛도 없구 냄새도 지독하구 영양가마저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가치관이 혼란스러운 혹은 막 세상에 눈 뜬 듯한 사춘기소녀의 넋두리와 한으로 가득찬 일기장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정의감만 가득했던, 불평등에 분개하고 따지기 좋아하고 진정한 사랑에 대해서는 눈꼽 만큼도 몰랐던, 유토피아는 꿈꿨지만 삶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던 저의 십대 때를 보는 듯 했습니다.^^ 물론 아직도 저는 행동하지 않는 페미니스트이고 권위를 싫어하지만 저항할 줄 모르는 나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이긴 합니다. 그런면에서 저자는 노력가이고 실천가라고 볼 수 있겠지요. 뿐만아니라 저자는 그때나 지금의 저보다는 사람들을 설득하고 자신을 변명할 잡다한 정보 역시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것 같긴 합니다..)
육식을 옹호하는 글이라고 해도 이 보다는 좀 더 나은 책이 나오면 시간 낭비 걱정 안하고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그런 책을 안읽은 것도 아닙니다. 저자의 얘기들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저 잡동사니의 모음에 불과합니다.(개인의 삶을 두고 하는 이야긴 아닙니다. 그가 제시한 이론들이 그렇다는 말이지요.) 서평 쓰신 모 PD님 이 책 정말 끝까지 읽으신 건가요? 읽고 그렇게 감동을 받으셨나요?
*추신 : 송아지 목을 자르는 것과 나무 열매를 따는 게 정말 같다고 느끼나요?
사람이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과 멀쩡히 살아있는 동물을 죽여서 먹는 것이 정말 같다고 느껴지나요? 그렇다면 차라리 지천에 깔려있는 흙을 먹고사는 게 더 낫지 않나요? 저자의 말처럼 어차피 식물도 동물을 먹고 동물도 식물을 먹고, 사람도 동물을 먹고 동물도 사람을 먹는 것이 섭리라면 오로지 먹고 살아남기 위한 경쟁이 자연계의 섭리라면 그리고 흙 역시 게걸스럽게 사람을 먹는 것이라면 사람이 천적인 흙에 대항해서 좀더 적극적으로 흙을 먹어치워야 하는 것 아닐까요? 도살 보다는 더 쉽고 효율적일 것이구요..
그리고 문명의 발달은 농업 이전에 불과 함께 시작된 것이 아닌가요? 불이 아니었으면 농업은 발달하지 못했겠지요.( 저자가 그렇게 못마땅해하는 농업아닌가요?)
그렇다면 불이 없던 그 이전 시대로 돌아가서 사나운 동물들에게 사람들이 쫓기고 잡아먹히던 그 시절로 돌아가자는 얘긴가요? 먹고 먹히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므로 "평화롭게" 포식자들의 먹이가 되어주기도 하고 잡아먹기도 하면서 여기저기 거처를 옮기며 사는 것이 자연스러운 삶이니 그리 살고 싶다는 얘긴가요?
포식자로서의 인간의 지위를 위해 가축을 사육해서 잡아먹는 것보다 차라리 사육장과 동물원의 우리를 걷어치우는 것이 진정으로 (저자가 말하는) '자연에 개입하지' 않는 행동 아닐까요?
무엇이 자연에 개입하지 않는 행동이고 무엇이 자연의 순리인지 묻고 싶습니다.
모든 진화와 발전을 무시하고 인간을 흙 속의 박테리아와 동등하게 보는 것이 평등이고 순리를 따르는 길인가요? 그렇기 때문에 먹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먹고 먹히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다는 그것이 순리인가요? (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전통은 이럴 때 갖다 쓰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만물의 영혼을 직접 느끼고 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생명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고 즐기기 위한 사냥은 더더욱 하지 않았습니다. 평화로운 그들의 삶을 파괴한 건 서구의 금융자본과 철도산업과 육식산업이었습니다. 서구의 금융자본이 제국주의와 전쟁으로 벌어들인 돈이라는 것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알지요. ) 그렇게 본능만 난무하는 삶이 순리를 따르는 삶이고 좋은 삶이라면 출산제한이나 자동차 안타기, 환경운동이라는 것은 왜 하라는 것이지요? 자연계 안의 모든 생물을 자로 눌러서 키높이를 똑같이 만들어야 한다면서 (문명을 발달시켜온 인간의 고유성과 독창성을 폭압적인 권위로만 해석하는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음식의 다양성을 운운하는 것은 왜이지요? ( 농업의 발달은 안되고 육류식단의 메뉴가 느는 것은 찬성인가요? )그것이 평등이라면 자연계를 지탱하고 진화를 이끄는 힘의 논리, 적자생존의 원리는 이 세상의 권위와 권력을 뒷받침하는 불합리한 힘의 논리와 무엇이 다른가요?
저자는 채식주의자에서 잡식주의자로 바뀌었는지는 모르지만 세상을 투쟁과 경쟁의 시각으로만 보던 관점에 있어서는 변화가 전혀 일어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비건일 때도 자신을 찬미하고 논쟁에서 이기기위한 논리만 찾았지 진정한 사랑이 바탕이 안되었던 것처럼 잡식을 주장하고 인간적인 성장을 운운하는 지금도 여전히 사랑에는 눈뜨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오히려 더욱 본능에만 충실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닐까, 그가 말하는 영성이란 어떤 것일까 궁금해집니다...사랑이 없이는 지구를 구하기는 커녕 자기자신도 구할 수 없는 것이겠지요. "건강"은 먹는 것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저자는 비건이 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사랑했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채식을 오랫동안 해오신 어떤 분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 우리의 사명이 무엇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채식은 인류의 사랑을 완성시키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거나 자연의 순환에 무지한 것이 아니라 가능한 폭력의 순환에 참여하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100%가 안되는 것은 압니다. 그렇다고 최소화하는 노력조차 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지요. 우리는 순수주의자가 아닙니다. 사랑과 평화를 완성할 수 있는 더 나은 방법을 찾고자 노력할 뿐입니다. 식물 역시 생명임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고 일단 가능한 범위 안에서, 지금 내 앞에서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 건강은 조화에서 나오고, 조화는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겠지요. 우리 모두는 이 여정 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랑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생각해보면 육식과 함께해 온 인류의 역사는 피의 역사입니다. 사랑을 강조하는 종교단체 마저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내가 건강하지 않으면 지구도 건강할 수 없고 지구가 건강하지 않으면 나도 건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육식을 해왔고 지금 심각한 문제가 느껴진다면 개인과 사회가 다른 선택을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다만 사랑에 보다 가까운 선택...그것은 자연의 또 하나의 섭리가 아닐까요? 그 어느 때보다 지금 자연이 더욱 갈구하고 있는 것은 사랑의 섭리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