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가 되었던,설령 내가 가장 만나기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일지도 그가 암에만은 걸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스스로를 조금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
‘내가 왜 암에 걸렸을까’에 대한 비 학술적 보고서
‘내가 왜 암에 걸렸을까?’
병원에서는 이 말만 꺼내면 아무리 떠들썩하고 유쾌했던 분위기도 단 몇 초 만에 쥐 죽은 듯 조용하고 숙연해졌다. 여기저기서 훌쩍훌쩍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환자는 “하늘도 무심하시지” 하며 통곡했다. 또 어떤 환자는 “내가 무슨 죽을죄를 지었다고 이런 벌을 받느냐”고 원망했다. 백이면 백, 모두 그랬다.
이 가슴 아픈 주제를 직시하는 환자는 만나지 못했다.
물론 나도 한동안은 이 문제를 회피하고 있었다. 어차피 병에 걸렸고, 아무리 땅을 치며 원망한들, 이미 내게 찾아온 암이랑 운명을 원점으로 되돌려놓을 수는 없을 테니까.
돌이켜봤자 상심만 커지는 일이어서 아예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궁금한 건 반드시 풀어야만 하는 내 천성을 이겨낼 순 없었다. 상태가 호전되어
지금은 내 방 책상에 앉아 컴퓨터로 글을 쓸 수 있게 되니 그 문제가 떠올랐다.
비로소 그 문제를 정리해볼 때가 된 것이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내가 왜 암에 걸렸는가?’를 분석하고 종합해보기로 했다. 물론 지금의 내겐 부질없는 짓이겠지만.
적어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경고 정도는 되지 않을까하는 마음이다.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암과 싸우면서 나의 몸과 마음은 이미 산산이 부서졌다.
아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누가 되었든, 설령 내가 가장 만나기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일지라도, 그가 암에만은 걸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나는 왜 암에 걸렸을까?’
한동안 나도 미칠 정도로 억울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가, 뭘 어쨌기에!
이제 고통이 가라앉고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만큼 체력이 회복되어 이성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듯하다. 내가 무엇을 크게 잘못했기에 하늘이 이렇게 심한 벌을 내렸는지,
그게 아니라면 왜 이렇게 힘든 시험을 거쳐야만 하는지.
컴퓨터 화면에 뜨는 글자들이, 그동안 가슴에 고였던 눈물 잉크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
먹는 게 문제였다
나는 처음 보는 음식도 언제나 기꺼이 맛보았다.
아빠가 요리사라서 다양한 요리를 맛볼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렇게 단련된 미각 덕분에 커서도 엽기적인 다큐멘터리 주인공처럼
온갖 것을 다 먹어 보고 다녔다. 메뉴는 상상을 초월한다.
공작,갈매기,고래,복어,꽃사슴,영양,곰,순록,멧돼지,뱀,전갈,지네,캥거루,악어…….
그야말로 동물도감을 연상시키는 메뉴다. 특히 고래는 일본에 있을 때 많이 먹었다.
어느 날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신음하는 지구’ 라는 주제의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다.
그제야 비로소 ‘아,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거야?’ 하고 후회했다.
그동안 음식을 먹은 게 아니라 생명을 빼앗고 있었던 것이다.
나 스스로 다른 동물의 생명을 파괴함으로써, 자연의 조화를 무너뜨리고,
결국 내 몸의 조화마저 무너뜨리고 말았다. 공존의 지혜를 너무 늦게 깨달은 셈이다.
그 다음으로 후회되는 것이 폭식과 폭음이었다. 나는 자유로운 스타일이라 일을 할 때는 명쾌하고 시원시원하게. 먹을 때는 누구보다 많이 먹고 마시는 편이었다.
유럽에서 지낼 때도 엄청 먹기로 유명했다. 지도 교수가 나를 식사에 자주 초대했는데.
그 이유는 식욕이 없는 부인이 내 식성에 반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순식간에 접시를 비우는 것을 보면 부인도 식욕이 생겼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밥상에 고기가 없으면 투정을 부렸고. 고기 없이는 아무리 많이 먹어도
속이 허전한 기분이었다. 엄마는 나의 이런 식습관이 아빠 때문이라고 몰아붙여
아빠를 쩔쩔매게 했다.
아빠는 서른 살 무렵부터 국가 특급 요리사로 활동했다. 1990년대만 해도 지금처럼
고급 호텔이나 음식점이 많지 않아서 아빠가 단연 유명했고, 고급 식당 요리사의 3분의 1가량이 아빠의 제자였다. 아빠가 일하는 호텔 식당에 가면 아저씨들이 나를 떠받들다시피 극진히 모셨다. 그러면서 내주는 게 귀한 고기 또는 특수 부위였다.
고기뿐 아니라 해산물도 닥치는 대로 먹었다.
맥도널드의 집에 처음 인사를 갔을 때의 일이다.
그의 집은 작은 섬에 있었다.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식탁 위에 가득 놓인 해산물에
매료되었다. 나는 식구들이 묻는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음식과 ‘전투’를 벌였고,
내 앞에는 삽시간에 게 껍데기가 수북하게 쌓였다.
그의 어머니는 그 모습을 보고 단번에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내가 말기 암 판정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책벌레’ 맥도널드는 건강 및 식이요법
관련 책까지 두루 섭렵했다. 콜린 캠벨(T. Colin Campbell)의 저서를 비롯해
암을 치료하는 식사요법 등을 줄줄이 꿰었다.
“지안, 이것 봐. 당신의 식사가 문제였어. 일부 가공 우유에 함유된 카세인이 강력한
암 유발 효과가 있다고 하잖아, 그리고 동물성 식품위주의 식생활은 비만이나
관상동맥 경화, 종양 같은 만성 질병을 일으키는 반면, 식물성 식품 위주의 식생활은
만성 질병을 예방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나와 있어. 당신은 지금까지 이것과는 거꾸로만 살았지. 곡물이나 채소, 과일이 몸에 진짜 좋은 건데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니.”
침대에 누워 입을 벌린 채 맥도널드가 먹여주는 음식을 받아먹게 된 나는, 결국
화학요법을 시작한 날부터 호랑이과에서 토끼과로 운명이 바뀌었다.
생각해보니, 무분별한 식탐의 결과가 결국 나 자신에게 돌아온 것이었다.
남의 살(고기)을 탐하다 못해 종국에는 자신을 먹어 삼킨 셈이다.
잠과 휴식을 업신여겼다
요즘은 많은 젊은이가 암에 걸리거나 과로로 죽는다.
일찌감치 성인병에 걸리는 경우도 늘고 있다.
하지만 그 원인은 종종 당사자가 아닌, 전문가나 주변 사람의 분석으로만 종합되어
나온다. 이미 병에 걸린 당사자는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아 글을 써서 세상 사람들에게
경고할 능력이 없고, 한편으로는 그럴 만한 의욕도 없기 때문이다.
반면 가르치는 것을 직업으로 삼았던 내게는, 여전히 젊은이들에게 진실을 알려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보는 사람 중에서 몇 명만이라도 생활을
바꿀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내가 지금 글을 쓰는 게 헛수고는 아닐 것이다.
나는 평소 늦게 자는 습관이 있었다. 사실 내 나이 때 늦게 잠자리에 든다고 해서
그다지 큰일은 아니다. 하지만 늦게까지 잠들지 않는 것은 확실히 건강에 좋지 않다.
지난 10년을 돌아보니 새벽 두시 이전에 자본 적이 거의 없다. 공부와 시험이라는
지고지순한 목표 전화 수다와 채팅, 인터넷 게시판 글쓰기, 술집, 노래방, 볼링, 혼자
생각하기(자칭 사색)등 별로 대단치도 않은 이유로 매일 새벽까지 잠들지 않았다.
가끔씩은 밤을 꼬박새우기도 했다. 일찍 잠자리에 든다 해도, 그게 새벽 한 시였다.
암에 걸린 뒤 나는《황제내경(黃帝內徑)》 같은 중국 의학책을 읽기 시작했다.
여기 몇 구절을 인용해본다.
오후 5~7시는 신장의 기운이 왕성한 시간이다.
저녁 7~9시는 심포(心包)의 기운이 왕성한 시간이다.
밤 9~11시는 삼초(三焦)의 기운이 왕선한 시간이다.
밤 11~1시는 담의 기운이 왕성한 시간이다.
새벽 1~3시는 간의 기운이 왕성한 시간이다.
새벽 3~5시는 폐의 기운이 왕성한 시간이다.
새벽 5~7시는 대장의 기운이 왕성한 시간이다.
여기서‘왕성하다’는 것은, 그 시간에 해당 장기들이 주요 활동을 한다는 말이다.
양생의 관점에서 보면 이 시간에 장기에 활동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인체의 기혈이
가치 없는 노동에 사용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 곧 휴식이요, 잠이다. 잠을 자는 시간에 모든 기혈이 ‘왕성한’ 기관의 활동을 집중적으로 도울 수 있기에 때문이다.
그러니 밤샘이나 늦게 자는 버릇이 오래 지속되면 몸에 좋을 게 하나도 없다.
암 판정을 받았을 때 간 수치가 꽤 높게 나왔다.
예전에는 간에 문제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상하게 생각했다.
‘어째서 간 기능에 문제가 생겼지’
간 기능이 나쁘면 화학요법을 계속할 수 없었다. 얼마 뒤 나는 이런 글을 찾았다.
밤샘은 간에 독약과 같다, 밤을 새우면 인체의 혈액이 머리로 집중되 어 내장의 혈액
공급량이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간에 산소 공급이 부족해 진다.
이것이 오랫동안 계속되면 간 손상을 유발한다.
밤 열한 시에서 다음 날 세 시까지가 간의 활동 능력이 가장 왕성한 시간 이자 혈액의
흐름이 상대적으로 부족해져 이미 손상된 간세포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급격히
악화된다.
간은 인체에서 가장 큰 대사 기관으로, 간이, 손상되면 온몸이 조금씩 파괴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걸핏하면 밤을 새는 것은 날마다 조금씩 스스로 목을 조르는
자살 행위와 같다. 의사들이 밤 열한 시 이전에 잠자리에 들고, 새벽 한 시에서
세 시 사이에는 깊은 잠에 빠져야 한다고 권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암 판정을 받은 뒤부터 내 생활은 차츰 안정되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스스로 생활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물을 마실 때도 목을 들고 빨대로 마셔야 하니 밤새는 짓 따위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날마다 아빠가 끓여온
‘귀한 물’을 마시고, 천연 비타민B를 복용하고, 잡곡 죽을 먹고는 고통 속에서도
충분히 자려고 노력했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대부분의 환자들이 화학요법 치료를 받은 뒤로
간 기능이 나빠지는 데 비해, 나는 오히려 좋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2차 화학요법을 받을 때, 내 간 기능은 정상인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벼락치기로 살았다
이제는 자랑스럽기보다는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지만, 인생의 벼랑 끝에 서서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니, 열 살 이후 20년 동안은 오로지 공부에 끌려 다니는 인생을 살았던 것 같다. 노는 것도 좋아했지만, 공부에서만큼은 어느 누구에게도 질 수 없었다.
‘공부’라는 단어는 그 뜻이 깊고 묘하다, 오직 자신만이 그것을 통해 얼마나 얻었는지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공부 그 자체에서 깨달음을 얻기보다는,
공부를 다른 것의 수단으로만 활용했던 것 같다. 경쟁과 승리의 수단.
공부라는 미명 아래 내 시간과 생명을 얼마나 낭비했는지는 나 자신만이 알 것이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나는 완벽한 ‘2W 스타일’이었다.
2W란‘시험2주 전(two weeks)'에 비상 모드에 돌입한다는 뜻. 몸과 마음을 혹사시키면서 스스로를 극단으로 몰아넣었다. 잠을 줄여가며 온갖 방법으로 내게 고문을 가했다.
그러면서도 친구들 앞에서는 여유를 부렸다.
“오늘 아침에 그냥 대충 읽어보는 시험을 봤는데 용케 운이 좋았네.”
이런 식이었으니 어떤 친구들은 나를 싫어했을 것이다.
나는 늘 스스로를 궁지로 몰고 시험에 들게 했다. 누가 선물거래 자격시험을 본다고 하면 나도 시험 교재를 사다가 봐야했고, 공인재무분석사(CFA) 붐이 일면 같이 달려들어
경쟁을 벌어야 했다. 오로지 이기는 재미에 죽어라고 공부를 했다.
“지안, 또 무슨 쓸데없는 자격시험 공부를 하고 있는 거지?”
그때마다 맥도널드는 깡말라가는 나를 보며 이렇게 걱정하곤 했다.
그때 그의 걱정에 귀를 기울였어야 했다.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얼마나 많은 책을 억지로 외웠는지 모른다. 시험 2주 전부터
자신을 몰아쳐 힘겹게 외우다 보니, 시험이 끝나면 2~3일은 기절한 것처럼
누워 있어야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병에 뒤에야, 비로소 예전의 습관이 얼마나 어리석고 해로운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마치 도끼를 힘차게 휘두르듯 자기를 혹사시킨 그런 습관이 결국에는
몸의 면역 기능을 해친 주범이었던 셈이다.
맥도널드는 그런 나를 두고 ‘한 번도 수리를 안 한 낡은 자동차를 끌고 나와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보름 동안 미친 듯 달리는 짓’이라고 비유했다. 그런 짓을 1년에 네다섯 번 정도만 하면, 아무리 튼튼한 소재와 부품으로 만든 자동차라고 한들, 금세 폐차가 되기
마련이다. 나이 서른에, 나는 이미 어떻게도 할 수 없는 폐차 신세가 된 것이다.
환경도 한몫했을 것이다
내가 암에 걸린 원인을 생각하다 보니 ‘환경’이란 주제까지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나는 노르웨이에서 환경 경제학 과정을 마친 뒤 돌아왔고, 푸단대학에 연구팀을 만들어 친환경 ‘에너지 숲’을 중국에 도입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맥도널드 역시 대학에 연구팀을 구성해 친환경 신소재를 연구해왔다.
환경에 관심을 갖기 전의 나는, 털털한 스타일이라 주변 환경이 나쁘다고 불편해본 적이 없었다. 2001년 일본의 훗카이도에 다녀왔을 때에도 그곳의 깨끗하고 아름다운 환경에 감탄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하이의 환경이 나쁘다고 투덜대지는 않았다,
어떤 일본 사람이 상하이 공항에 내려 목이 아프다고 할 때도 속으로 ‘그렇게 환경이 불만이면 왜 내렸대? 그냥 돌아가지’ 하고 비웃었다. 내가 ‘공기 오염’을 확실히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2007년 노르웨이에서 돌아왔을 때부터였다. 베이징 공항에 내리는 순간 눈이 따갑고 목이 콱 막혔다.
그제야 예전에 그 일본인이 생각났다. 어디에서든 맑은 공기를 접하기 어렵고, 마트는 시끄럽고, 도로에는 온통 제멋대로 달리는 자동차로 가득했다. 실제로 나와 비슷한 시기에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친구들 가운데 상당수가 6개월 안에 몸져눕고 말았다.
맥도널드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노르웨이라는 무균 실험실에 작은 중국 쥐들을 한동안 가둬놨다가 다시 원래 환경으로 돌려놓으니, 체내 면역 시스템과 항체가 병균의 침투를 막지 못한 셈이군.”맞다. 그로부터 몇 년 뒤 나는 유방암에 걸렸고, 또 한 친구는 흉선암 그리고 또 하나는 백혈병에 걸리고 말았다.
맥도널드는 “그때의 농담이 너무 심했다”면서 두고두고 자책하곤 했다.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데이터를 찾아냈다. 상하이 질병에 방통제센터 암 측정 통계 결과에 따르면, 상하이 여성의 암 발병률은 20년 전에 비해 두 배로 늘었다고 한다.
그리고 상하이 여성 100명 중 한 명이 암 환자라고 한다.
맥도널드의 프로젝트 가운데는 포름알데히드를 제거하는 나노 활성탄 연구가 있었다.
실험 중 우연히 포름알데히드 측정기를 켰는데, 갑자기 측정기가 비정상적으로 변했다.
일반적으로 포름알데히드 수치가 0.08 이상이면 인체에 유해하다.
그런데 모니터에는 0.87이나 나타났다. 주범을 찾으려고 물건을 하나하나 밖으로 꺼내며 측정했다. 마지막 가구를 검사하는 순간, 맥도널드는 돌처럼 굳어 버리고 말았다.
포름알데히드 수치가 엄청 높았던 것이다.
그 가구는 우리 집에서 한동안 쓰다가, 새로운 가구가 들어왔을 때 연구실로 옮겨놓은 것이었다. 그로부터 6개월 뒤에 나는 유방암 판정을 받았다. 의사는 “암이 발병하려면 오랜 시간과 과정이 걸리며, 몇 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 정상 세포가 암세포로 바뀌고 다시
종양으로 형성되기까지는 수년의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위험 요소가 유기체의 방어
시스템을 심각하게 파괴하고, 회복 능력을 떨어뜨려 세포 내에 변이된 유전자가 일정
정도 쌓인 뒤에야 암이 발병한다.
따라서 이런 가설도 가능하다.
‘나의 유방암은 당시 그 가구에 의해 씨앗이 심어졌고, 암세포가 긴 세월을 기다리다가, 나의 체내 면역력 방어선이 조금 무너졌을 때를 노려 맹렬하게 돌진한 것 아닌가’
하는. 맥도널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 역시 언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안다. 맥도널드가 밤마다 혼자 가슴을 치며 원통해하고 있다는 것을.
실험실에 처박혀 거의 매일같이 포름알데히드 제거신소재를 연구해온 사람이, 정작
자기 부인이 몇 년 동안이나 포름데히드가 기준치를 엄청나게 초과하는, 극도로
오염된 환경에서 살게 내버려두었으니, 남편은 지금도 그렇게 굳게 믿고 있다.
‘아니야, 맥도널드, 괴로워하지 마. 당신 잘못이 아니야.’
암의 정확한 원인은 누구도 알 수 없다. 단 한 가지 원인만으로 암에 걸리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자기 삶을 이루는 여러 환경을 세심하게 둘러볼 필요는 있다. 잘못된 습관이나 오염된 환경에 수년간 노출되다 보면, 언젠가 손쓸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을 수도 있으니까.
어쩌면 암이란 자신의 삶과 환경에 대한 무관심 속에서 자양분을 얻는지도 모른다.
“그때 조금만 더 신경을 썼더라면 하고, 늦었지만 자꾸 후회를 하게 된다.
나 자신을 조금만 더 소중하게 여길걸.”
왜 그때는 몰랐던 것일까.
눈물 때문에 모니터의 글자들이 흐리게 보인다.
모니터에서 눈물 잉크가 흘러내리는 것 같다.
- 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 저자 ;위지안
번역 이현아
출판사; 예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