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우스, 아프로디테, 헤라 등등 그리스와 로마 신화 신들의 이름을 줄줄이 꿰고있는 어린 딸아이에게 어느 날 <우리 신 이야기>라는 책을 사주었습니다. 그리고 저도 함께 읽어보았습니다. 어릴 때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떠오르며 해모수, 해부루, 금와, 유화, 온조, 주몽, 오늘이, 바리데기와 같은 아름다운 이름들과 함께 신비롭고 흥미로운 이이야기들에 금새 빠져들었지요.
"나는 하늘의 신이요, 천지만물의 아버지다. 일찌기 빛으로써 세상을 밝게하고 교화로써 인간을 가르쳤느니라. 내 뜻은 오로지 사람을 이롭게 하는 데 있을 뿐이다. 이로써 목숨 가진 모든 것이 번성하리라."
이것은 우리나라 건국신들을 소개하는 단원의 첫 페이지에서 환인에 대한 설명에 인용된 글입니다. <환단고기>를 참고했다고 하는데 환단고기를 찾아보니 우리나라 역사서라고도 하고 위서라고도 하지만 신화란 어차피 사실에 대한 기록 보다는 이야기에 가까운 것이니까요. 다만 이야기이긴 하지만 집단무의식이나 민족 원형설을 이야기한 정신분석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칼 융은 '신화는 인간의 무의식에 대한 이야기이며, 상징을 통해 벌거벗은 인간이 무엇인지를 들려준다.' 라고 했습니다. 즉, 신화를 통해 한 민족이 공유하고 있는 무의식을 알 수 있고 그 민족의 구성원인 개개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도구로써 신화를 활용할 수 있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겠지요. 그래서 우리에겐 우리의 신화가 중요한 것일 테구요.
어쨌든 하늘의 신이요 천지만물의 아버지라고 한 환인은 오직 사람을 이롭게 하여 목숨 가진 모든 것이 번성하게 하는 것에 뜻을 두었으며 그것은 곧 우리 민족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의 참된 의미이기도 하고, 우리 민족이 의식, 무의식적으로 지향해 온 고귀한 이상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 문장을 잘 살펴보면 그 고귀한 뜻이 사람을 이롭게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리하여 "목숨가진 모든 것이 번성하리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즉, 생명 가진 모든 존재의 번성과 번영이 하늘의 뜻이며 선조들의 이상이었던 것이라고 해석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정신이 면면히 후손들의 의식 속에서도 이어져왔으리라는 생각이 당연히 들기도 하구요.
민족마다 고유의 문화와 정신형성을 추진하는 기본적인 힘이 민족원형을 형성하는 집단무의식 속에 있다고 한 국내의 어떤 학자는 나라가 어지럽거나 외부압력이 지나치게 클 때 민족은 자위책의 하나로 민족의 원형으로 돌아가려하며 나라의 흥망과 성쇠도 이에 달려있다고 까지 했습니다. 따라서 민족의 정신적 원형을 회복하지 못하면 위기를 넘기기 어렵지만 원형의 회복에 성공한다면 위기를 넘기고 나라의 안정과 성공을 이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재밌는 것은 이와 비슷한 원형을 가지고 있는 민족이 또 하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유태민족인데요, 그들의 민족 역사서이기도 하고 신화이기도 한 구약성서의 창세기를 보면 첫머리에 이렇게 시작되어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제가 보기엔 우리의 건국신화 보다 다소 구체적이긴 하지만 매우 비슷한 이상과 이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누구나 알듯이 유태민족은 이집트의 지배에서부터 나치의 지배에 이르기까지 매우 험난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민족으로 인정받으며 널리 연구되고 있지요. 그들이 그토록 험난한 역사를 극복할 수 있었던 저력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겠지만 이 민족의 의식의 원형 즉, 정신의 뿌리에 그 힘의 원천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민족의 운명과 함께해온 이 힘은 변화와 계승, 발전을 거듭하여 지금은 유태민족만이 아니라 유럽과 미대륙, 중동 그리고 그들과 인접한 여러 나라들에게까지 전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신화와 역사를 매우 소중히 다루어왔지요.
어찌되었든 지금은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 사상과 우리의 신화 속의 공통점이 저의 주 관심사인데, 그것은 바로 생명과 우주만물에 대한 존중의 의식이며, 신의 창조물로서의 겸허함과 자부심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자부심이 자연과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즉, "다스린다"의 의미가 지배와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피조물들의 번성과 번영을 함께 추구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렇게 해야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이 기뻐하시리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 민족의 이상이며 온인류의 무의식에 내재해있는 에덴동산, 유토피아에 대한 원형이며, 인간 의식의 내면의 나침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더불어 가져 봅니다.
또한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타민족이나 국가들 보다 특별히 더 민족의식이 강할 수 밖에 없는 여건을 가지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 그 어느 때보다 어렵고 혼란스러운 지금 우리 신화에 대한 연구는 우리의 정신의 뿌리를 찾는 일이며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찾도록 도와 근본적인 치유와 함께 희망적인 미래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어주리라는 생각이며 나아가서 신화 뿐만아니라 역사에 대한 겸허하고 진지한 접근과 연구가 활발해졌으면 하는 바램이 드는 것은 비단 저만의 일은 아니리라 생각됩니다.
끝으로 부언하고 싶은 것은, 고조선의 건국신화 부터 시작해서 이어지는 우리의 신화 전반에 드러나는 생명과 자연에 대한 존중의 의식을 비롯하여 선조들의 깊고 차원 높은 의식들에 대한 연구들을 통하여 우리의 후손들에게 우리의 문화와 정신에 대한 긍지를 가질 수 있게 도와주고 나아가 미래에 대한 범우주적인 이상을 고취시켜줄 수 있는 지혜와 덕을 물려줄 수 있길, 우리 어른들이 이제라도 해야할 노력이 이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