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이라 늦은 아침을 먹고는 조금 쉬었다가 옷장에서 차분하고 단정한 옷을 찾아 꺼내입고 딸아이와 집을 나섰습니다. 비가 올거라는 일기예보와는 달리 날씨는 화창하고 햇살은 참 따스했습니다. 너무도 따사로운 햇살에 오히려 약간의 슬픔을 느끼며 몇 발작 걸어서 아파트 단지를 막 벗어날 무렵 웬 흑나비 한 마리가 커다란 날개를 팔랑거리며 나즈막한 정원수 위를 그리고 다시 우리 앞을 지나치며 잠시 춤을 추는 듯 손을 흔드는 듯 하늘거리다 저만치 사라졌습니다. 마치 우리가 어딜 가려는지 알고나 있는듯이 말이지요.
생각해보면 요즘처럼 <역사>가 아니 <시대>가 석탄기관차 같은 굉음을 내며 나의 가슴 한 복판을 뚫고지나간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팔삭둥이 처럼 좀 늦된 탓에 언제나 가족 안에서도 또래들 안에서도 타의 반 자의 반으로 아웃사이더처럼 지내온 개인적인 성향이나 이력이 그렇듯 늘 좀 엉뚱하고 사차원적이고 사오정적이기까지한 나의 가슴과 머리를 이렇게 강하게 내리친 사건은 다름아닌 세월호의 침몰과 그 전후의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이없는 무수한 광경들입니다.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이 만연해있는 부패와 무력한 인명구조체계...피기도 전에 가혹한 바람에 떨어진 꽃송이 같은 그 아이들이 겪었을 두려움과 고통을 생각하면 너무도 참담하고 너무도 가슴 아프기야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남아있는 가족들의 아픔과 삶은 또 어떠할 것이며 앞으로의 이 나라는, 내 아이들이 살아갈 이 세상은 도대체 어디로 향해가고자 하는 것인지, 절망인지 비분인지 탄식인지 모를 슬픔과 떨림과 두려움을 안고 묻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독백이든 방백이든 우주 어딘가에는 닿으리라 생각하면서 묻고 묻고 또 물으며 인터넷기사들과 이전에 보았던 책들 사이를 종횡무진하며 일을 하는건지 밥을 먹는건지 기도를 하는건지 모르게 어느덧 3주 하고도 나흘이 지난 날, 액체가 다 빠져나와 푸석거리는 것 같은 가슴을 안고 시청의 합동분향소를 찾았습니다.
하얀 국화를 영전에 바치고 향을 꽂고 평화와 안식 속에서 편히 잠들기를 기도하며 그렇게 작별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나와 시청 인근의 한 찻집에서 나는 커피를 시키고 딸아이는 시원한 생과일 쥬스를 한 잔씩 시켜 한 모금씩 두 모금씩 마시며 마음을 가라앉혀 보았습니다. 안산 단원고 인근의 '세탁소집 아들 현탁이'의 어머니께서 쓰셨다는 편지를 찾아 딸내미에게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는 카페입구에서 아른거리는 햇살을 쬐며 옹기종기 창가에 몰려 앉아있는 선인장과의 다육이들에게로 시선이 물처럼 흘렀지요. 참 귀엽기도하네!! 하며 가까이 가서 하나하나 살펴보는데 한 아이 앞에서 눈길이 머물렀습니다. 열 가닥은 족히 돼보이는 가지들이사이좋게 고개를 길게 빼고 들깨처럼 작고 앙증맞은 노란 꽃봉오리들을 주렁주렁 달고있었습니다. 파는 것이 아니고 카페사장님께서 취미로 키우시는 다육이들인데 화초를 사오신 값만 받으시고 흔쾌히 선물로 내어주십니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 물을 주라는 말씀도 잊지 않으시구요. 감사한 마음으로 입양해온 이 아이의 이름은 "희망이" 입니다. 이름이 희망이이니 당연히 매일 바라보며 내 마음 속의 "희망"에게도 물을 주려구요. 그리고 잊지 않으려구요. 4월 어느 날 느닷없이 가슴아프게 떠난 하얀 영혼들을, 그들이 왜 그토록 일찍 생을 마감해야 했는지 잊지 않으려구요. 그리고 무엇으로 그들의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할 것인지 매일같이 했던 고민들을 잊지 않으려구요...
'좋은 사회'란 어떤 사회일까? 행복한 사회란 어떤 것인가? 모든 가치가 화폐로 책정되고 화폐로 대체될 수 없는 것은 그 가치를 점점 인정받지 못하고, 산업이든 정치든 의료든 교육이든 모든 곳에서 시장의 논리만이 유일한 기준인 것처럼 작용하고, 밑빠진 독에 물을 붓듯 매체란 매체들은 모두 매일같이 끝없는 소비를 부추기고 소비자가 "사람"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오늘날 '부자되기'가 온국민의 '유일한 상식'이 되어있는 듯한 지금의 사회가 좋은 사회이거나 행복한 사회가 아닌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풍요로운 사회도 아니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이런 방향으로만 계속 달리고 있으며 어떤 대안을 스스로 찾아내고 있지 못한 게 아닐까, 그것이 세월호의 참사를 불러온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대안을 찾기 위한 진정한 고민들을 더 늦기 전에 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노 명우라는 사회학자는 <세상물정의 사회학>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풍요는 좋은 삶을 누리는 사람에게만 허락된 행복이다. 풍요로운 곳은 비싼 옷과 희귀한 음식이 넘쳐흐르는 곳이 아니라, 좋은 삶이 펼쳐지는 터전이다. 이전에 비해 비싼 옷을 입고 예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기름진 음식을 매끼 먹고 있지만, 풍요로운 삶과 거리가 멀다고 느껴진다면, 어느새 우리가 좋은 삶에서 멀어진 채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좋은 삶이란,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도 누릴 수 있는 좋은 삶이란 어떤 삶일까요?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는 어떤 신학대학의 대학생이 경찰이 있지도 않은, 시위의 배후가 누구냐고 자꾸 다그쳐묻는 것에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 고 하신 하느님의 말씀이 배후라고 했다는 인터뷰 기사가 기억납니다. 그리고 "우리가 희망을 만들어야 희망이 있다"고 하셨던 어떤 선승의 말씀도 기억이 납니다.
나는 정치인도 아니고 사회학자도 아니고 사회운동가도 아닙니다. 아이가 아프면 밤새 마음졸이며 곁을 지키다가 아침이 되면 밥 한술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다시 출근해야하는, 그래도 퇴근 후 반기는 아이들의 미소에 모든 근심이 녹아버리는, 꿈많은 두 아이를 둔 직장맘이며 초콜릿복근과는 무관한, 안경쓰고 배 나온 평범한 한 남자의 아내이고 지방의 작은 치과에서 매일같이 평범한 이웃들의 구강을 들여다보며 가족과 이웃들의 한 마디 말, 표정 하나에 일희일비하며 평범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한 명의 시민일 뿐인 나 자신을 돌아봅니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요?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기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다시 생각해 봅니다. 좋은 사회란 어떤 사회일까?...
잘은 모르지만 하나는 분명히 알 것 같습니다. 생명을 존중하는 사회, 나의 생명을 소중히 하듯 타인의 생명도 소중히 여기는 사회, 나의 삶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타인의 삶도 소중하게 여기는 사회, 부와 권력도 좋겠지만 이웃들과 함께 행복한 것이 더 좋은 삶임이 상식 중의 상식인 사회, 나아가서 대자연의 소중함도 알고 탐욕과 교만을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사회는 어떤 시스템에서도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을 가진 사회일 것이며, 그런 사회를 이루기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로 모여있는 공동체는 정말 살맛나고 희망적인 공동체일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사회란 고정되어있는 것이 아니며, '사회'는 '시장'보다 크고 '정의'는 '시장주의' 보다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생명은 언제나 정의와 함께있다고 믿습니다. 우리 사회의 정의가 숨쉬고 자라게하기 위해서는 생명에 대한 우리자신의 태도를 다시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느덧 서산으로 지는 해가 창가에 긴 석양을 늘어뜨리고 있습니다. 심호흡을 해 봅니다. 멀리 바라보며 긴 호흡으로 그러나 멈추지 않고 걸어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 다함께, 서로의 혼과 얼들을 붙잡아주면서 희망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고 싶습니다. 서투르지만 이제라도 함께가는 법을 배우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