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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5-21 13:36
15년 독학으로 지은, ‘에너지 제로’ 해를 품은 집
 글쓴이 : 설경도
작성일 : 12-05-21 13:36 조회 : 2,11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518194126… [2254]
15년 독학으로 지은, ‘에너지 제로’ 해를 품은 집
 
홍천 | 글 박주연 기자·사진 이상훈 선임기자 jypark@kyungyang.com
 
입력 : 2012-05-18 19:41:26수정 :2012-05-18 19:41:26
 
 
ㆍ홍천 살둔마을에 ‘패시브하우스’ 짓고 사는 이대철씨

강원도 홍천군 살둔마을은 북으로는 국내에서 가장 울창한 활엽수림인 개인산이, 남동쪽으로는 진달래가 장관인 석화산이 에워싼 풍광 좋은 곳이다. 해발 400m의 첩첩산중이다. 가장 가까운 병원이 자동차로 30분 거리에 있고 택배로 물건을 하나 받으려면 15㎞ 떨어진 읍내까지 나가야 한다.

워낙 오지여서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때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해서 살둔(살 만한 언덕)이라는 마을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2009년 이 산간 오지에 ‘돈키호테’가 연상될 만큼 저돌적인 사나이 한 명이 찾아든다. 이상주의자 이대철(67·사진). 15년간 독학으로 초에너지절약형 건물인 ‘패시브하우스’를 연구한 그는 석유, 석탄, 천연가스와 같은 화석연료를 전혀 쓰지 않는 제로에너지하우스를 이곳 살둔마을에서 직접 실현해 보였다. 이 집은 보일러 없이도 겨우내 20~21도의 실내온도를 유지한다. 에어컨이 없어도 여름엔 시원하다. 핵심원리는 햇볕을 최대한 받아들이고 벽과 지붕에는 구조용 단열패널(SIP), 바닥에는 스티로폼을 깖으로써 건물 내부를 보온병처럼 빈틈없이 감싸 열손실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보조난방이라야 일명 페치카로 불리는 러시아 난로를 개조한 장작 때는 벽돌난로뿐이다.
환기를 위해 열효율 90% 이상의 열 회수 환기장치를 다는 것도 필수다. 여름엔 밤새 창을 열어 냉기를 받아들인 후 낮 동안 창문을 닫아 냉기를 유지한다. 햇볕은 적절한 길이의 처마를 이용해 최대한 차단한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던 그는 지금도 더욱 완벽한 제로에너지하우스를 위해 도전 중이다. 은퇴 후 편안한 삶을 누릴 나이에, 그는 왜 이런 불편한 삶을 자청한 것일까.

 
“30년 전 경기도 용인 마북리에 전원주택을 지으며 시골생활을 시작했어요. 사방이 통유리창으로 트인 용인 집은 아름다운 자연을 집 안에서 감상하기에 최적의 환경이었죠. 언론에도 여러 차례 보도될 만큼 유명세를 탔어요. 하지만 겨울철엔 단열에 취약한 유리창 탓에 난방 보일러를 아무리 세게 돌려도 온 가족이 오들오들 떨어야 했어요. 그래서 에너지에 관심을 갖게 됐죠. 당시 저희 가족의 전원생활을 책으로 엮어 받은 인세 2000만원을 모두 에너지 관련 해외서적을 사는 데 썼어요. 수많은 전문가들은 세계 석유 생산량이 2012년, 늦어도 2~3년 후 정점을 찍은 후 급감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어요. 정부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심각하게 경고하고 있는 셈이죠. 정점 이후 석유 값은 빠른 속도로 치솟을 게 자명하잖아요. 우리나라의 경우 1년치 건물 냉난방 비용만 대략 30조~48조원이라고 해요. 지금이라도 정부는 냉난방 시설이 없어도 되는 건물을 만드는 데 팔걷고 나서야 해요. 내복 입기, 불필요한 전기코드 뽑기 수준의 에너지 절약으론 턱도 없는 일이죠. 그래서 당장 저라도 솔선수범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건축쇼가 열리면 미국 어디든 한걸음에 달려갔다. 한국과 달리 스웨덴, 독일 등 유럽에서는 패시브하우스가 이미 20년 전부터 확산되기 시작했고 이는 미국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1990년대 후반 댈러스에서 열린 한 건축쇼에서 그는 살둔집의 주요 자재로 이용하게 되는 구조용 단열패널을 발견했다. 그 특성을 꼼꼼히 메모한 그는 귀국하자마자 용인 집 노천에 천막을 치고 만든 개인목공실에 틀어박혀 이를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단지 패시브하우스 실현이 목표였다면 쉬운 길을 걸었을 것이다. 요즘 일부 건축가가 그렇게 하듯이 독일 등의 외국 회사에서 설계부터 모든 제품까지 수입해오면 간단하기 때문이다. 왜 어려운 길을 자처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석유 위기가 오면 가장 큰 피해를 입을 사람은 경제적 혜택을 덜 받는 농어촌 노인들을 비롯한 서민들”이라며 “그들을 위해 국내 기후에 적합하면서도, 비용적인 면에서도 기존 주택보다 더 비싸지 않은 보급형 주택을 직접 설계해 제공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는 살둔제로에너지하우스가 제시하는 기본조건을 모두 충족시켜서 집을 짓더라도 기초부터 마감까지 평당 시공비는 400만원이면 된다고 장담했다. 그동안에 이곳을 다녀간 사람은 5000명에 이른다.

그는 정보 공유 차원에서 살둔집을 홈페이지(http://zeroenergyhouse.kr)와 워크숍 등을 통해 공개해왔다. 살둔집은 2009년 강원도 에너지대상, 2011년 국회의장 기후변화대상을 수상했다.

“지금도 에너지 낭비가 큰 공공건물과 대기업 건물이 계속 들어서고 있어 안타까워요. 대표적인 게 서울시청 신청사와 서초동 삼성 본사 건물이에요. 일단 건물을 유리로 뒤덮은 건 에너지 절약 측면에서 최악의 선택이거든요. 건물은 아름다울지 몰라도 여름에 냉방장치를 정지하면 80도 이상 온도가 오를 거예요. 계란을 책상 위에 놓으면 곧 반숙이 될 정도의 온도죠. 겨울에 밤새 난방장치를 정지한다면 다음날 아침 모든 실내온도는 외부온도와 거의 같아질 거고요. 돈을 줘도 냉난방 에너지를 살 수 없는 미래를 대비해야 할 정부와 대기업이 앞장서서 이런 건물을 짓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죠.”

그는 대형 건축회사와 건축가들이 에너지 비효율적인 건축물을 끊임없이 짓는 이유를 “유가가 오늘날의 생수값보다 훨씬 싼 시절에 건축을 배웠고 변화를 꺼리면서 ‘설마’ 하는 안일한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정부는 과거 동력자원부와 같은 에너지 전담 중앙행정기관을 만들어 에너지 고갈 시대를 준비해야 하고 대기업은 CEEO(Chief Executives Energy Officer·에너지담당최고책임자) 제도를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는 대국민 설득 전에 삼성, LG 등 대기업이 냉장고 등 가전제품에 대기전력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장치를 반드시 설치토록 의무화해야 해요. 이미 판매한 제품에는 에너지를 최소한으로 절약하는 스위치를 달도록 무상으로 나눠주고요.”

장면 총리 시절 검찰총장을 지낸 고 이태희씨의 셋째아들로 1945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그는 40년 전부터 목공이 취미였다. 싱크대, 탁자, 의자 등 집안의 웬만한
가구는 모두 그가 만든 것들이다. 살둔집 뒤편에 마련된 100평 크기의 목공실은 들어서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진다. 공구만 5t 트럭 15대분이란다. 30여년간 사 모았다는 망치만 디자인별로 2000여종에 이른다. 뭔가에 꽂히면 끝장을 보는 그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때 작은 텃새들을 위한 새집을 만들어 대기업에 납품하기도 했다. 새들에게 어떤 집이 최적인지 알아내기 위해 100가지 이상의 다양한 새집을 디자인해 숲속에 매달고 오랜 시간 관찰했음은 물론이다.

그는 서울대 임학과를 나왔다. 그런데 임학과를 선택한 건 순전히 낮은 성적 때문이었다. 경기고 동기 480명 중 350등이었던 그가 서울대에 들어가려면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다. “얼떨결에 입학했지만 4년 동안의 배움 끝에, 임학과는 산악과라는 나만의 정의를 내렸으며 졸업과 동시에 나는 미친 듯이 산을 사랑하는 산악인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그의 생일은 식목일인 4월5일이다. 그의 말마따나 그와
나무의 인연은 ‘운명’이다.

첫 직장도 나무와 밀접할 수밖에 없는 인니동화개발이라는 제지회사였다. 그는 1971년 인도네시아 칼리만탄(보르네오)의 삼림조사원으로 파견됐다. 영국인이 도맡던 이 일을 한국인이 맡은 것은 처음이었다.

“목숨을 건 위험한 일이었어요. 정글에서 나침판을 잃어버리거나 맹장염만 생겨도 죽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현지인 8명을 이끌고 하는 일은 원시 정글을 측량하고 거기에 놓일 도로를 설계하는 것이었죠. ‘인도네시아의 전설’이라 불릴 정도로 펄펄 날았어요. 보통 보름 쉬고 보름 정글에 들어가는 일이 반복됐죠. 워낙 스트레스가 큰 일이다보니 정글에 들어가지 않는 날은 독한 술을 물처럼 마셨어요. 그러다 어느 날 졸도하고 말았죠. 병원으로 후송돼
건강 진단을 받은 후 귀국 명령이 떨어졌어요. 제가 거기서 죽으면 곤란하니까 회사가 저를 자른 거예요.”

1973년 대우실업에 들어가 캐나다와 미국 주재원으로 7년 근무했다. 김우중 회장이 미국 출장을 올 때마다 통역을 맡을 만큼 그는
영어를 썩 잘했다. 하지만 결국 김 회장의 눈 밖에 나면서 1980년 마흔도 안된 나이에 쫓겨났다고 한다. 그는 “나는 회사 체질이 못돼 조기 퇴직당했지만 대우에서 근무하는 동안 끝없는 도전, 그리고 실패하더라도 성실하게 노력하는 것이 인생임을 배웠다”고 말한다. 당시 그의 손에 쥐어진 퇴직금은 1500만원이었다. 초창기 멤버라고 퇴직금 750만원의 두 배를 준 것이었다. 그는 이 돈으로 흙과 산과 나무가 있는 용인에 평당 5500원씩 주고 2500평의 땅을 사서 전원주택을 지었다. 이 땅이 개발붐을 타고 현재 평당 500만원이 돼 1000배 가까이 올랐으니, 세상일은 참 알 수 없는 것이다. 그 사이 대우는 부도가 났으니 말이다.

회사를 떠난 후엔 수직기를 수입·판매하는
매장을 십수년간 운영했고, 운영비가 승용차보다 싼 소형 헬리콥터를 수입·판매한다고 5년을 허비하기도 했다.

“헬리콥터가 전 세계적으로 히트를 쳤는데 한국에서만 안 팔리더라고요. 하도 답답해서 항공대학 대학원에 입학했어요. 미국에서 열리는 항공이벤트는 다 따라다녔죠.(웃음) 한 대도 못 팔았으면서 헬리콥터에 꽂혀 날린 돈만 2억원쯤 돼요.”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일을 벌였고 또 실패하기를 반복했다. 그는 “실패하면 늘 새로운 목표를 세워 스스로 자극했다”고 말했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이지만 그의 저돌적 여정은 멈추지 않는다. 그는 “남은 생애 동안 내가 남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 중 하나는 그동안 쌓은 지식과 노하우를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제로에너지하우스를 짓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경험 있는 목수를 직접 소개해 주고 최대한 전 과정에 관여하고 있다. 살둔집의 건축 노하우를 담은 책 <살둔제로에너지하우스>(시골생활)를 최근 펴낸 것도 그 일환이다.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5181941265&code=10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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