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폐렴, 그 역습이 시작됐다
국내 폐렴구균 80% ‘다제내성’으로 확인
1940년대 ‘마법의 탄환’이라 불리는 페니실린 발견 이후 무수한 생명이 항생제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인류가 마침내 기나긴 병원균과의 전쟁에서 완전히 승리를 거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70여 년 만에 항생제가 등장하기 이전처럼 다시 단순한 감염이나 상처로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시대가 올 수 있다는 세계보건기구(WHO)의 경고가 나왔다. 항생제가 통하지 않아서 비롯되는 ‘항생제 이후 시대(post antibiotics era)’를 지적하고 있는 것.
폐렴은 백신과 강력한 항생제의 개발로 거의 퇴치된 가벼운 질병으로 간주됐다. 그러나 새로 나타난 폐렴구균은 여러 항생제에 말을 듣지 않는 다제내성균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폐렴구균 80%가 3종류 이상의 항생제에 말을 듣지 않는 것으로 조사됐다. ⓒhealthtap.com
‘돌아온 장고’ 폐렴.
과거의 질병이라고 무시해온 폐렴이 막강하게 재무장을 하고 다시 돌아와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기존 항생제에도 끄떡하지 않는 강력한 세균으로 변신해 우리의 건강을 해치고 있다.
폐렴은 세균과 바이러스, 그리고 곰팡이에 의한 감염으로 발생하는 폐의 염증이다. 백신이 개발된 이후 감염률과 발생률이 현저하게 줄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치명적인 ‘슈퍼 세균’으로 변신해 다시 돌아왔다. 지난 10년간 사망률이 급증하면서 급기야 사망원인 11위의 질병으로 뛰어 올랐다.
국내 폐렴구균 80%, 3종류이상 항생제 안 들어
지난 7월 우리나라 질병관리본부는 국내에서 발견된 폐렴구균의 80%는 3가지 종류 이상의 항생제에 반응하지 않는 이른바 ‘다제내성(multi drug resistance)’으로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더구나 비교적 최근에 개발된 새로운 3세대 항생제들에 대한 내성조차 높은 수준으로 나타났다. 갈수록 폐렴 치료가 앞으로 쉽지 않다는 경보다.
폐렴구균은 폐렴, 축농증(부비동염), 중이염, 수막염 등 급성 감염질환의 원인이 된다. 약제에 대한 내성이 강해 특히 면역력이 약한 어린이와 노인에게 치명적이다.
질병관리본부의 보고서에 따르면 2009~2013년 방사선 검사로 폐 감염이 확인된 폐렴 환자들의 객담(가래)에서 분리한 폐렴구균 109건을 정밀 분석한 결과, 79.6%가 3종 이상의 항생제에 동시 내성을 보이는 다제내성으로 분류됐다. 앞으로 폐렴을 고치기가 힘들 수 있다는 지적이다.
16가지 항생제의 개별 내성률을 보면 에리트로마이신(84.3%)·아지트로마이신(83.3%)·테트라사이클린(78.7%)·메로페넴(73.1%)·클린다마이신(68.5%)·트리메소프림-설파메톡사졸 복합제(57.4%)가 모두 50%를 넘고, 높게는 80%를 웃도는 경우도 있었다.
3세대 신약이라고 할 수 있는 세팔로스포린계 항생제인 세파클러(79.6%), 세프록심(63.0%), 세페핌(46.3%), 세프트리악손(28.7%), 세포탁심(25.9%)의 내성률 역시 낮은 수준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 연구에서 인류가 만든 ‘최후의 항생제’ 반코마이신이 듣지 않는 폐렴구균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외신보도에 따르면 이미 반코마이신에 내성이 있는 슈퍼 박테리아도 발견되고 있다.
WHO, 항생제 내성 강화 ‘심각한 위협’
한편 ‘에볼라’와 ‘메르스’(MERS, 중동호흡기증후군) 바이러스 공포가 지구촌에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세계보건기구(WHO)는 지난 4월 말 보고서를 통해 각종 바이러스와 병균, 박테리아의 항생제 내성 강화가 인류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영국 BBC방송에 따르면 세계보건기구(WHO)는 세계 114개국에서 수집한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세계 모든 지역에서 항생제 내성 강화 현상이 일어나는 것으로 확인됐다는 것.
WHO 보고서는 “항생제 이후 시대에는 수십 년간 간단하게 치료할 수 있었던 단순 감염으로도 사망할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서둘러 적절하고 필요한 조치를 하지 않으면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특히, 폐렴 구균 등 박테리아는 자연적으로 돌연변이를 형성하며 항생제에 내성이 생기기도 하지만, 의사가 과도한 항생제 처방을 하고 환자가 이를 끝까지 투약하지 않고 도중에 중단함으로써 생기는 항생제 오용과 남용으로 예상보다 빠르게 내성이 길러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항생제는 성병의 하나로 불임을 일으키는 임질의 마지막 치료제였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최근 영국에서 치료에 실패했다면서 이런 현상은 오스트리아, 호주, 캐나다, 프랑스, 일본, 노르웨이, 남아프리카공화국, 슬로베니아 등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밝혔다. WHO는 임질의 경우 전 세계에서 매일 100만 명 이상이 감염된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 영국 보건당국 책임자는 지난해 박테리아의 항생제 내성 강화는 기후변화에 따른 위협과 맞먹을 정도로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며 그 피해도 점점 증가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항생제 내성은 인간의 생명과 직접 관련돼 있다.
만성질환과 고령화도 원인 가운데 하나
한편 최근 폐렴으로 인한 사망자 수의 증가는 폐렴구균의 내성 이외에도 만성질환자의 증가, 그리고 고령화 차원에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또한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비만도 원인들 가운데 하나다.
자료에 따르면 암환자는 물론 당뇨병이나 폐질환, 그리고 심혈관 질환자가 많이 늘었다. 이들은 면역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폐렴구균에 감염될 확률이 높다. 비만인 사람도 마찬 가지다.
당뇨병 환자는 건강한 사람보다 폐렴에 걸릴 위험이 약 6배, 만성폐질환은 7배, 만성 심장질환은 10배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많은 경우가 그렇겠지만 특히 폐렴은 면역력이 약한 사람들을 찾아가 생명을 앗아가는 대표적인 질병이다.
고령인구의 증가도 폐렴으로 인한 사망률을 높인다. 면역력이 떨어져 폐렴에 걸리기 쉽고 치료경과도 좋지 않은 경우가 많다. 젊은이에 비해 폐렴 발생률이 5~10배가 높다.
또 다른 한가지 이유가 있다. 1990년 이후 새로운 타입의 항생제가 등장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세계적인 항생제 회사들은 불과 몇 명에 불과한 환자들을 위해 내성에 강한 항생제 개발이 이윤창출에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에서다.
한국은 2009년 이미 고령화 사회로 진입했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고령화가 진행되는 나라 가운데 하나다. 전문가들은 50세 이상인 경우 독감과 폐렴백신을 맞는 것이 가장 좋은 예방책이라고 충고한다.